[LG전자]빨걸 빨아라 3탄....3.1절을 맞이하여...지난번 LG그룹이 독립자금을 댈때 누구는 기생집가서 놀고 자빠졌다고 …
작성일 23-10-2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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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よしき 조회 64회 댓글 0건본문
1. 이병철 회장은 1930년대, 삼성상회 양조업을 통해 큰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같이 기생집을 드나들며 세월을 보낸다. 점차 강화되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노선으로 국가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일제에 당할 때 당하더라도…" 목숨 걸고 독립군 자금 1만원 선뜻 내놔
조선일보 이예은 객원기자
입력 2019.02.28 03:01
LG 구인회 창업주
독립운동계 거물 안희제 선생이 독립군 양성 자금 부탁하자 지원
구인회 창업회장 부친 구재서 공은 김구 선생에 5000원 지원하기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LG가(家)에 중경임시정부 청사 복원사업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시설 및 국가유공자 지원 사업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연암(蓮庵) 구인회<작은 사진> LG 창업회장과 부친인 춘강(春崗) 구재서 공이 중경임시정부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독립자금을 지원한 일화는 태평양전쟁으로 시국이 좋지 않았던 1942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남 진주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경영하고 있던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당시 유림 사회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혔던 백산(白山) 안희제 선생이었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안희제 선생을 20년 만에 만났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안희제 선생은 학자 안효제 교리의 친척 동생으로 일찍이 구인회 창업회장 조부인 만회(晩悔) 구연호 공과 안효제 교리가 한양에서 함께 지낸 인연으로 친분을 쌓았다. 안효제 교리가 구연호 공을 만나러 올 때마다 안희제 선생 또한 함께 왔었기 때문에 소년기의 구인회 창업회장과 수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안희제 선생은 과거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던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기도 했다. '백산상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7년에 폐업했지만, 당시 국내 최대의 독립운동 비밀자금 루트로 구인회 창업회장의 사돈이자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 옹이 설립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병 치료차 잠시 귀국했던 안희제 선생은 만주로 돌아가기 전, 독립군 양성 자금 1만원을 부탁하고자 구인회 창업회장을 찾아온 것이다. 1931년 7월에 자본금 2000원으로 '구인상회'를 세운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1만원은 당시 80㎏짜리 쌀 1가마니가 약 20원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쌀 500가마니에 해당하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을 뿐 아니라 목숨을 내놓는 결심이었다. 일제가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안희제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업기반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풍비박산 날 것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인회 창업회장은 '당할 때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자금을 희사한 것이다.
이런 큰 결심의 배경에는 구인회 창업회장 부친인 구재서 공이 1930년경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일정(一丁) 구여순 선생을 통해 당시 상해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 5000원을 지원한 일이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안희제 선생은 일제 경찰에 잡혀 고문을 당한 끝에 1943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 당시 안희제 선생이 국내에서 모금해 중경임시정부에 보낸 20여만 원은 대한독립에 큰 힘이 되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19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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