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이번에 돈번사람만 읽어라 ㅡ북한은 쿠바식개혁개방을하먼성공한단다
작성일 24-09-2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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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よしき 조회 19회 댓글 0건본문
2011년 소규모 자영업 허용하며 경제 활기
쿠바 경제는 흔들렸다. 식량도 자급하지 못했다. 소련이 보내주던 비료와 농약, 농기계와 부품, 그리고 농기계를 돌릴 연료가 사라지자 농업은 황폐해졌다. 쿠바 정부는 완강하게 고집하던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수리하기로 했다. 체제 개혁으로 국민 경제 위기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쿠바는 2011년 택시, 민박집, 렌터카, 스파, 식당, 이발소, 미용실, 청소업, 수리업, 건설노동 등 180여 업종의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다. 건설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은 일거리는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진 민영 식당의 리모델링 작업이었다. 이전에는 국가가 모든 건물을 보유하고 수리와 리모델링도 해줬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뒤에는 국가가 이런 일을 더는 해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개인의 돈을 받고 이 작업을 맡았다. 이들이 수리한 낡은 건물은 민영 식당과 민박집으로 영업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하던 건설노동자들은 2~3년 전부터 건설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민간기업은 허용되지 않으니 조합식 기업을 만든 것이다. 농민들이 이전부터 농업조합을 만든 것을 본뜬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 기업만 있던 쿠바에 건설조합, 농업조합, 미용조합 등 조합식 기업이 등장했다. 조합식 기업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다. 이런 조합식 기업은 정부나 공기업이 제대로 고용하지 못한 실업자를 많이 흡수했다.
민영화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분야가 민영 식당과 민박집이다.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이들 업종을 민영화했지만, 현지인 이용도 늘고 있다.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돈 있는 사람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 가이드는 부자는 아니더라도 수입이 늘고 있다. 밀수를 비롯한 불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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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국영관광사의 요트와 파워보트가 떠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바다 주행과 스노클링 체험, 작은 섬에서의 식사와 음악 공연 등으로 외화를 번다.
공기업인 국영 상점에서 '물건 빼기' '뒷거래'
가장 큰 문제는 국영 상점이다. 국영 상점은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백화점이나 대형수퍼 형대로 운영하는 곳은 수입품이나 비싼 물건을 취급한다. 쿠바는 이중 화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쿠바에는 쿠바페소(CUP: Cuban Peso)라는 고유 화폐가 있지만 소련이 몰락하고 원조가 끊기면서 극심한 경제난을 겪자 1993년부터 미국 달러화 유통을 허용했다. 그러자 달러가 쿠바의 실질적인 화폐가 되자 2004년 CUC(Cuban Convertible Peso)을 도입했다. ‘외화와 바꾼 돈’으로 미국 달러화와 가치가 연동한다. 현지에선 1달러에 0.94정도로 교환되고 있었다.
국영 상점은 주로 CUP 대신 CUC을 사용하는데 부정부패가 심하다. 국영 상점의 물건은 모두 나라 것으로 나라에서 정해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 직원들은 모두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기업 직원이다. 국가에서 주는 월급이 미화로 20달러, 많아야 25달러 정도이니 생활비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쿠바에는 물건이 부족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점원들이 구매자와 협상해서 정해진 가격보다 비싼 값을 주는 사람에게 판다. 예로 아디다스 신발 가격이 80달러인데 100달러를 주겠다는 사람에게 파는 식이다. 이런 거래를 한번 할 때마다 20달러가 남는데 이를 모아 직원들까지 나눠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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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호텔 로비에 걸려있는 피델 카스트로(오른쪽)과 체 게바라(왼쪽)의 사진. 이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감사 나온 공무원, 두 달 월급 뇌물에 넘어가
이런 일은 국영 상점은 물론 호텔 등 다양한 국영기업에서 버젓이 이뤄진다. 나라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 수가 없으니 국정 가격과 시장 가격의 차이를 이용해 국영기업 직원들이 돈벌이를 하는 셈이다. 국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셈이다. 국영기업 사장은 이런 상황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원들이 사장에게도 적당히 돈을 상납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공무원을 보내 감사를 벌이고 부정을 적발한다. 하지만 감사 나온 공무원도 국가에서 매달 20~25달러의 월급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부정 감사는 업무라기보다 핵심 부수입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걸렸다 하면 국영상점 직원들은 감사 나온 공무원에게 20~40달러 정도의 뇌물을 준다. 거의 협정 가격이다. 한 건 적발에 한두 달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뇌물로 챙길 수 있으니 이를 제대로 적발해 상부에 보고하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 속에 잡음 없이 유지된다. 국영기업 직원이 민영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면 대개 이런 돈을 쓰는 경우일 것이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에 가로막혀 ‘좋은 게 좋은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주민들은 ‘소시올리시모(sociolisimo: 파트너주의)’나 ‘아미구이스모(amiguismo:친구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이런 상황을 돌려 말한다고 한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는 사람을 누구도 욕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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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쿠바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의 피델 카스트로 모습. 세월도 많이 흘렀고 피델은 2016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권력을 물려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4월 중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쿠바 공산당 제1서기 자리만 유지할 예정이다. 쿠바의 공산체제는 개혁을 통해 수리하면서 유효기간을 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쿠바 시내에 있는 민영 식당의 모습, 모터사이클이 벽에 걸려 있다. 서구 주요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카페나 식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직원들이 팁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 창업에 해외 거주 쿠바인이 물주
국영기업에 다니면서 자영업체에서 몰래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창업하는 사람들은 대개 직장을 그만둔다. 처와 아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민박집과 테이크아웃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직장이 있는 나도 틈나는 대로 가족을 돕는다.
창업을 결심했을 때 가진 돈이 2000~3000달러밖에 안 돼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사는 가족, 친지와 외국인 친구로부터 투자도 받고 빌리기도 해 8만~10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다. 쿠바에서 창업하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에 가족, 친지나 친구가 있는 사람이다. 해외 거주 쿠바인은 쿠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이르며 이 중 18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한다. 일부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미국에 거주한다. 유럽에는 쿠바 식당이나 시가 바가 인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은 대부분 1959년 쿠바가 공산화된 뒤 망명한 사람들이다.
미국은 1966년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인 1966년 ‘쿠바조정법(Cuban Adjustment Act)’을 만들어 쿠바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쿠바인은 누구든 1년 이상만 거주하면 영주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쿠바와 협상한 끝에 ‘젖은 발, 마른 발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도입했다. 쿠바와 미국 사이 바다에서 잡힌 쿠바인(젖은 발)은 정치적 탄압이 예상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쿠바로 돌려보내고, 일단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쿠바인(마른 발)에겐 계속 입국 비자를 주고 1년 이상 거주하면 영주권도 부여하는 제도다.
쿠바는 2012년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면서 이렇게 망명한 사람도 ‘배신자’에서 ‘경제적 난민’으로 용어와 개념을 바꿨다. 미국 거주 쿠바인이 쿠바의 가족, 친지에게 직간접적으로 보내는 송금이 쿠바 경제를 지탱하는 데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쿠바 경제는 흔들렸다. 식량도 자급하지 못했다. 소련이 보내주던 비료와 농약, 농기계와 부품, 그리고 농기계를 돌릴 연료가 사라지자 농업은 황폐해졌다. 쿠바 정부는 완강하게 고집하던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수리하기로 했다. 체제 개혁으로 국민 경제 위기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쿠바는 2011년 택시, 민박집, 렌터카, 스파, 식당, 이발소, 미용실, 청소업, 수리업, 건설노동 등 180여 업종의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다. 건설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은 일거리는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진 민영 식당의 리모델링 작업이었다. 이전에는 국가가 모든 건물을 보유하고 수리와 리모델링도 해줬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뒤에는 국가가 이런 일을 더는 해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개인의 돈을 받고 이 작업을 맡았다. 이들이 수리한 낡은 건물은 민영 식당과 민박집으로 영업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하던 건설노동자들은 2~3년 전부터 건설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민간기업은 허용되지 않으니 조합식 기업을 만든 것이다. 농민들이 이전부터 농업조합을 만든 것을 본뜬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 기업만 있던 쿠바에 건설조합, 농업조합, 미용조합 등 조합식 기업이 등장했다. 조합식 기업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다. 이런 조합식 기업은 정부나 공기업이 제대로 고용하지 못한 실업자를 많이 흡수했다.
민영화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분야가 민영 식당과 민박집이다.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이들 업종을 민영화했지만, 현지인 이용도 늘고 있다.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돈 있는 사람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 가이드는 부자는 아니더라도 수입이 늘고 있다. 밀수를 비롯한 불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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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국영관광사의 요트와 파워보트가 떠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바다 주행과 스노클링 체험, 작은 섬에서의 식사와 음악 공연 등으로 외화를 번다.
공기업인 국영 상점에서 '물건 빼기' '뒷거래'
가장 큰 문제는 국영 상점이다. 국영 상점은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백화점이나 대형수퍼 형대로 운영하는 곳은 수입품이나 비싼 물건을 취급한다. 쿠바는 이중 화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쿠바에는 쿠바페소(CUP: Cuban Peso)라는 고유 화폐가 있지만 소련이 몰락하고 원조가 끊기면서 극심한 경제난을 겪자 1993년부터 미국 달러화 유통을 허용했다. 그러자 달러가 쿠바의 실질적인 화폐가 되자 2004년 CUC(Cuban Convertible Peso)을 도입했다. ‘외화와 바꾼 돈’으로 미국 달러화와 가치가 연동한다. 현지에선 1달러에 0.94정도로 교환되고 있었다.
국영 상점은 주로 CUP 대신 CUC을 사용하는데 부정부패가 심하다. 국영 상점의 물건은 모두 나라 것으로 나라에서 정해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 직원들은 모두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기업 직원이다. 국가에서 주는 월급이 미화로 20달러, 많아야 25달러 정도이니 생활비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쿠바에는 물건이 부족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점원들이 구매자와 협상해서 정해진 가격보다 비싼 값을 주는 사람에게 판다. 예로 아디다스 신발 가격이 80달러인데 100달러를 주겠다는 사람에게 파는 식이다. 이런 거래를 한번 할 때마다 20달러가 남는데 이를 모아 직원들까지 나눠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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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호텔 로비에 걸려있는 피델 카스트로(오른쪽)과 체 게바라(왼쪽)의 사진. 이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감사 나온 공무원, 두 달 월급 뇌물에 넘어가
이런 일은 국영 상점은 물론 호텔 등 다양한 국영기업에서 버젓이 이뤄진다. 나라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 수가 없으니 국정 가격과 시장 가격의 차이를 이용해 국영기업 직원들이 돈벌이를 하는 셈이다. 국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셈이다. 국영기업 사장은 이런 상황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원들이 사장에게도 적당히 돈을 상납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공무원을 보내 감사를 벌이고 부정을 적발한다. 하지만 감사 나온 공무원도 국가에서 매달 20~25달러의 월급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부정 감사는 업무라기보다 핵심 부수입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걸렸다 하면 국영상점 직원들은 감사 나온 공무원에게 20~40달러 정도의 뇌물을 준다. 거의 협정 가격이다. 한 건 적발에 한두 달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뇌물로 챙길 수 있으니 이를 제대로 적발해 상부에 보고하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 속에 잡음 없이 유지된다. 국영기업 직원이 민영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면 대개 이런 돈을 쓰는 경우일 것이다.
쿠바는 이처럼 뇌물에 가로막혀 ‘좋은 게 좋은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주민들은 ‘소시올리시모(sociolisimo: 파트너주의)’나 ‘아미구이스모(amiguismo:친구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이런 상황을 돌려 말한다고 한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는 사람을 누구도 욕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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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쿠바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의 피델 카스트로 모습. 세월도 많이 흘렀고 피델은 2016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권력을 물려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4월 중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쿠바 공산당 제1서기 자리만 유지할 예정이다. 쿠바의 공산체제는 개혁을 통해 수리하면서 유효기간을 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쿠바 시내에 있는 민영 식당의 모습, 모터사이클이 벽에 걸려 있다. 서구 주요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카페나 식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직원들이 팁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 창업에 해외 거주 쿠바인이 물주
국영기업에 다니면서 자영업체에서 몰래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창업하는 사람들은 대개 직장을 그만둔다. 처와 아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민박집과 테이크아웃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직장이 있는 나도 틈나는 대로 가족을 돕는다.
창업을 결심했을 때 가진 돈이 2000~3000달러밖에 안 돼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사는 가족, 친지와 외국인 친구로부터 투자도 받고 빌리기도 해 8만~10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다. 쿠바에서 창업하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에 가족, 친지나 친구가 있는 사람이다. 해외 거주 쿠바인은 쿠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이르며 이 중 18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한다. 일부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미국에 거주한다. 유럽에는 쿠바 식당이나 시가 바가 인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은 대부분 1959년 쿠바가 공산화된 뒤 망명한 사람들이다.
미국은 1966년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인 1966년 ‘쿠바조정법(Cuban Adjustment Act)’을 만들어 쿠바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쿠바인은 누구든 1년 이상만 거주하면 영주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쿠바와 협상한 끝에 ‘젖은 발, 마른 발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도입했다. 쿠바와 미국 사이 바다에서 잡힌 쿠바인(젖은 발)은 정치적 탄압이 예상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쿠바로 돌려보내고, 일단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쿠바인(마른 발)에겐 계속 입국 비자를 주고 1년 이상 거주하면 영주권도 부여하는 제도다.
쿠바는 2012년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면서 이렇게 망명한 사람도 ‘배신자’에서 ‘경제적 난민’으로 용어와 개념을 바꿨다. 미국 거주 쿠바인이 쿠바의 가족, 친지에게 직간접적으로 보내는 송금이 쿠바 경제를 지탱하는 데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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