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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よしき 댓글 0건 조회 19회 작성일 24-09-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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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주식 액면분할...황제주에서 국민주 될까?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2018-03-1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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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가 280만 원 찍고 50분의 1로 기습 액면분할… 주당 액면가 100원
⊙ 1990년대 사업 다각화 포트폴리오가 주가 상승으로 이어질까 관심
⊙ 오너 부재 속 최고의 기업 자리 유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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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성전자 본사.
  삼성전자가 지난 1월 31일 ‘50대 1의 주식 액면분할’을 전격 실시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주당 액면가는 종전의 5000원에서 100원으로 낮아진다. 발표 당일 삼성전자의 종가는 249만5000원. 이날을 기준으로 하면 삼성전자의 한 주당 가격은 4만9900원이 된다. 삼성전자는 오는 3월 주총에서 액면분할 안건을 처리할 예정인데, 이 안건이 통과되면 주식 투자자들은 적은 돈을 투자해 삼성전자의 주주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기습 결정은 주주가치 제고 차원에서 이뤄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31일 “앞으로 주주들에게 배당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7년에는 2016년보다 배당을 40% 더 많이 하고, 2018년에는 2017년보다 배당을 100% 더 늘리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발표대로라면 오는 2018~2020년까지 3년 동안 삼성전자 주주들에게 돌아갈 배당금만 29조원이다. 주식 투자자 입장에서 삼성전자가 매력적인 주식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발표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삼성전자 한 주당 주가가 200만원을 훌쩍 넘다 보니, 일반인들이 쉽게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주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액면분할을 통해 삼성전자는 그간의 ‘황제주’라는 이미지를 벗고 ‘국민주’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호재 발표에도 불구하고 일단 외국인과 기관투자자의 반응은 냉랭하다. 발표 하루 뒤에 외국인은 8만5800주, 기관은 4만4600주를 쏟아냈다. 일부 증권사는 목표 주가를 10만~15만원으로 낮춘 보고서를 발표했다. 삼성전자의 주가가 최고를 경신하는 시점에 내놓은 극단적 조치에 과연 시장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삼성전자는 펀더멘털이 강한 회사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첫 효자상품은 TV
 

1970년대 한국은 흑백 TV 방송을 하고 있었다. 제4공화국 시절, TV 제조 공장의 모습.
  삼성전자(당시 삼성전자공업)는 1969년 1월 경기도 수원에서 시작했다. 1970년에 내놓은 첫 번째 생산품은 흑백 TV와 선풍기였다. 하지만 가전업계는 금성사(현 LG전자)와 대한전선(대우그룹에 매각)이 이끌고 있었고, 삼성은 이 중 가장 후발주자였다. 외국에서 기술을 배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이 가전제품을 일일이 뜯어가며 제품을 개발했다. 후발업체로서 인지도가 적었던지라, 삼성전자는 설립 5년 내내 적자였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주문으로 삼성전자를 이끌게 된 사람은 얼마 전 타계한 고 강진구 전(前) 삼성전자 회장이다. 강 전 회장은 그룹 오너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삼성전자에서 회장직(1990~1998년)에 오른 사람이다. 강 전 회장은 1973년 삼성전자 상무로 자리를 옮기고 삼성전자의 독자 기술 개발을 위해 사활을 걸었다. 삼성전자 설립 6년 만인 1975년, ‘이코노 컬러 TV’를 출시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TV는 전원을 켜고 20~30초간 예열해야 화면이 서서히 나타나는 형태였는데, 이코노TV는 전원을 공급하면 예열 없이 바로 화면이 뜨는 TV였다. 1970년대 중반은 오일쇼크로 인해 전기 절약에 관심이 컸던 터라 삼성의 TV는 인기였다. 출시 첫해에만 3만4000대가 팔렸다. 삼성전자는 TV 판매로 창업 6년 만인 1975년에 처음 흑자를 기록했다.
 
  삼성전자 부회장을 지낸 윤종용 삼성전자 비상근 고문이 1969년 삼성전자에 합류하고 TV사업부장(1980년)과 VIDEO 사업부장(1981년)을 맡아 삼성전자가 독자적 기술력을 개발하는 데 힘을 보탰다. 글로벌 삼성전자의 초창기를 책임진 효자상품은 TV와 비디오였다. 1982년, 뉴욕에서 발행하는 《비디오 지》는 삼성전자의 이코노 컬러 TV를 ‘크리스마스를 맞아 소비자들이 알맞은 가격으로 장만할 수 있는 최고의 품목’이라고 게재했다. 삼성전자가 선두 주자인 금성사를 이기고 가전 부문에서 신흥 강자로 발돋움할 즈음에 삼성전자는 또 다른 사업 분야로 관심을 돌린다. 삼성전자를 글로벌 회사로 만든 반도체였다.
 
 
  힘들여 64K D램 개발하자마자 ‘치킨게임’에 휘말려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고 이병철(맨 오른쪽)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오른쪽에서 둘째) 회장.
  이병철 그룹 창업주의 결단으로 삼성은 19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 채비를 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결단과 아들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적극적인 의지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태동기를 맞는다. 삼성전자의 가전을 6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시킨 고 강진구 회장이 삼성 반도체통신 사장을 맡았고, 실무는 삼성전자 부회장을 지낸 이윤우 고문이 맡았다. 이 고문은 1968년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입사했고 1976년부터 삼성반도체의 초창기 기술 개발을 담당했다. 고 강진구 회장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이병철 창업주는 매년 12월 20일을 전후해 일본으로 건너가 신년을 보낸 다음 1월 중순께 귀국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른바 동경 구상이다. 1983년 2월 초 동경에 머물던 이병철 창업주는 전화로 반도체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일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메모리 반도체 중 가격 경쟁이 치열하고 공급 과잉이 예상되더라도 시장 규모가 큰 D램을 하기로 했다. 당시엔 우리의 취약한 기술력과 자본력 등을 이유로 정부조차 비관적이었다.〉
 
  실제로 미국·일본은 10년 먼저 반도체 분야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반도체 조립 라인 한 개를 갖추는 데 당시 돈으로 200억원이 투자돼야 했다. 삼성전자는 150명의 엘리트 사원을 뽑아 반도체 신규사업팀을 꾸렸다. 직원들은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 선진기술을 배워오는 등 독자 기술을 개발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983년 12월 1일, 삼성전자는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돈을 벌지 못했다. 설비 투자비가 워낙 커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해도 곧장 수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반도체 64K D램의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 4달러 수준이던 64K D램의 가격은 1985년 중반 들어 개당 30센트까지 떨어졌다.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미국의 모토로라·인텔·마이크론과 일본의 NEC·히타치 등이 서로 경쟁하며 물량을 저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반도체 사업의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는 맥을 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병철 창업주는 반도체가 미래의 먹거리임을 확신했다. 이후 삼성은 256K D램(1984년), 1M D램(1986년)을 잇달아 개발했다.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전자 기흥공장 1·2라인에 이어 3라인까지 설립을 지시했을 때, 회사 내부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이병철 창업주가 1987년 갑작스레 타계를 하게 된다.
 
 
  1990년대 반도체를 개발한 해외파 천재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의 반도체 D램.
  이병철 창업주에 이어 삼성그룹의 수장이 된 이건희 회장은 누구보다 반도체 사업에 애착이 큰 사람이었다. 이 회장은 1987년 12월 1일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 수준의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자”고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4M D램(1988년), 16M D램(1989년)을 잇달아 개발했다.
 
  그리고 1992년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이뤄진다. 세계 최초로 64M D 램을 개발한 것이다. 미국, 일본보다 10년 가까이 늦깎이로 출발한 삼성전자가 세계 시장에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그즈음 삼성전자 반도체에는 해외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인재에 대한 욕심, 또 이건희 회장의 ‘천재 한 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소신을 일찍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 출신으로 IBM 왓슨 연구소에 있던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1985년 삼성전자에 합류, 삼성전자 메모리본부 제품개발센터장(1992년)을 맡았다. 미 MIT 전자공학 박사 출신으로 인텔사 자문을 맡고 있던 황창규 KT 회장은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미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박사인 권오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은 1985년 미국 삼성 반도체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 해외파 인재들은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기흥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이윤우 삼성전자 상임고문과 함께 반도체 개발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1993년,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로 오르고 256M D램(1994년), 1G D램(1996년) 등을 최초로 개발하며 삼성의 저력을 보여줬다.
 
 
  2000년대, 휴대전화까지 성공하며 삼각편대 완성
 


  삼성전자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가전 부문은 TV가 점차 대형화되고 고품질 영상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PDP TV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이즈음 휴대전화 사업이 차세대 먹거리 사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초창기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사업부를 이끈 사람은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1973년 삼성전자 라디오과에 입사해 근 20여 년을 음향기기·비디오생산부·화상무선기기사업부·팩스사업부에 근무했던 이 전 부회장은 1992년 무선사업부로 발령을 받는다. 당시 무선사업부는 회사 내에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부서였다. 이 전 부회장이 무선사업부로 발령받은 직후 구미사업장에서 ‘불량제품 화형식’을 가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삼성산(産) 휴대전화와 무선전화기 500억원어치를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당시 이 부회장은 “무선사업부 이사로 발령받았을 때 힘들었다. 실적도 부진했고 회사 내 평가도 좋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1990년대 말 휴대전화 ‘애니콜’을 선보이며 국내 시장을 주도하던 모토로라를 단숨에 눌렀다. 삼성전자는 2002년 휴대전화를 세계 3위로 끌어올리며 ‘애니콜 신화’를 창조해 냈다.
 
  국내에 불어닥친 IMF의 늪은 삼성도 비켜가지 못했다. 일본 본사 대표로 있던 윤종용 고문은 1996년 삼성전자 총괄 사장으로 복귀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전체 직원의 30%를 줄이고 한계 사업을 정리하면서 ▲반도체 ▲휴대전화 ▲첨단 디지털 가전을 3대 축으로 내세웠다. 삼성전자는 2000년 반도체와 가전, 휴대전화의 삼각편대를 완벽하게 꾸리며 그해 매출 43조5278억원을 기록했다. 매출 비중은 반도체 31.8%(13조8521억원), 소비자가전 29.4%(12조8133억원), 휴대전화 18.4%(7조9962억원)였다. 반도체의 힘은 강했다. 2000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중 71%(6조4351억원)가 반도체에서 나왔다. 하지만 반도체는 시장 흐름에 따라 부침이 큰 업종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불과 1년 뒤인 2001년,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9.3%에 불과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00년 국내 증시는 국제 메모리 반도체 가격 때문에 주가가 등락을 거듭했다. D램 분야에서 138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사상 최대의 실적을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000년 9월 이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쳤다”며 “이후 극심한 D램 업계의 구조조정이 시작됐고, 삼성전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살아남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치열한 경쟁과 함께 미세화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기술 장벽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당시 증권가의 애널리스트들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경기 사이클이 뚜렷했지만 이제 몇 달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라는 보고서를 쏟아내며 삼성전자의 주가 전망을 조심스럽게 예측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의 주가는 주당 20만원을 오르내렸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반도체에 대한 열정은 그 와중에도 식을 줄 몰랐다. 황창규 회장은 ‘플래시 메모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플래시 메모리는 모바일에서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용도로 겨우 사용될 뿐이었다. 황 회장은 1998년 플래시 메모리의 성장 가능성을 예상하고, 연구에 돌입했다. 256Mb 낸드플래시 메모리(1999년), 512Mb(2000년)가 잇달아 개발됐다. 삼성전자는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2003년 세계 시장 점유율 70%를 기록하며 1위로 떠올랐다.
 
 
  3개 부문이 건전한 경쟁 벌여
 

삼성의 초창기 휴대폰인 ‘애니콜’. 이후 ‘삼성 갤럭시폰’ 신화의 밑거름이 됐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반도체 산업은 미세한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기술 장벽이 높아지면서 업체 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1995년 당시 20개에 달하던 D램 업체들은 2001년 11개로 줄어든 데 이어, 2008년에는 삼성전자, 하이닉스, 엘피다, 키몬다, 마이크론 등 5개 진영으로 정리됐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휴대전화 부문이 200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세계 시장에서 선두권을 유지하자, 이번에는 소비자가전 부문이 나섰다. 소비자가전 부문은 일명 ‘백색 가전’으로 불렸던 시절과 완전히 결별한 채 연일 신기술을 앞세운 TV를 선보였다. 일익을 담당한 이는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 TV가 2006~2016년까지 11년 연속 세계 TV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는 데 일조했다. 첫 작품은 와인잔을 형상화한 ‘보르도TV’였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에 힘입어 2006년 11월, 세계 TV시장에서 LCD TV·평판 TV, 전체 시장 모두에서 1위를 달성하는 ‘트리플 크라운’의 쾌거를 올렸다. 2008년에는 장미색을 가미한 ‘크리스털 로즈TV’를 선보여 판매량 2000만 대, 세계 점유율 20%를 장악했다. 2009년에는 ‘파브 LED TV’로 더 얇고 선명한 TV를 구현했고, 이후 3D TV, 스마트 TV로 주도권을 잇고 있다. 2014년에는 세계 최초로 커브드 UHD TV를 출시했다. 화면 양쪽 끝이 중앙으로 살짝 휜 TV를 말한다. 시야 영역을 넓게 확보해 실제 영역보다 넓게 보이는 파노라마 효과를 구현한다.
 
  휴대전화 부문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2009년 무선사업부장에 취임한 신종균 부회장이 ‘갤럭시’ 신화를 이끌어냈다. ‘갤럭시 S’ 스마트폰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0년 3월이다. 2009년 아이폰 3G S와 2010년 아이폰 4 출시 중간 시점에 출시됐다. 휴대전화 사업은 지난 2012년 3분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을 제치고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갤러시’ 시리즈가 ‘아이폰’을 이긴 것이다. 신종균 부회장은 2012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LCD(액정표시장치)·TV와 같은 사업이 세계 1등인데, 자신이 맡은 휴대전화 부문만 2등이어서 마음고생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삼성전자 CEO들 사이에서 각 부문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전자 세 부문의 건전한 경쟁은 오늘날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이 되는 밑거름이었음이 분명하다. 신 부회장은 당시 ‘스마트폰 1위 달성’ 축하 인사에서 “분기 1등을 한 번 했을 뿐이다. 더 열심히 해서 연간으로도 1등을 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삼각함대의 고른 성장은 실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006년 총 매출은 85조8346억원이었는데, 휴대전화가 전체의 23.6%(20조2497억원), 소비자가전 24.2%(20조7749억원), 반도체 26.6%(22조8276억원)였다. 신종균 부회장의 5년 전 다짐처럼 삼성전자 휴대전화 매출이 부쩍 늘었다. 삼성전자는 2015년 총 200조653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 중 51%가 휴대전화 부문(103조5542억원)에서 나왔다. 반도체는 23.7%(27조4868억원), 소비자가전은 23.4%(46조8954억원)였다.
 
 
  오너의 부재에도 흔들림 없었다
 

북미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TV 부문.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임원 인사를 발표했다. 반도체 부문 사람들이 대거 승진했다. 삼성전자 측은 “철저히 실적에 따라 인사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은 여전히 ‘맏형’으로서 삼각편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삼성전자 내에서 매출 비중이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곳 또한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2015년 삼성전자 전체 매출 중 반도체가 차지한 부분은 23.7%였지만, 영업이익의 48.4%가 반도체에서 나왔다.
 
  삼성전자에는 한동안 오너 경영인이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누운 지 3년이 지났다. 이재용 부회장은 수감 중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굳건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 매출 62조, 영업이익 14조53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이다. 삼성전자의 2017년 3분기 실적을 찬찬히 살펴보면 30여 년 전 삼성전자의 사업 다각화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 부문의 실적이 빠지면, 다른 곳에서 그 부분을 메워주고, 또 다른 부분이 예기치 못한 부진에 시달릴 때 다른 쪽은 선전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는 메모리 고용량화의 영향으로 수요가 느는데, 이에 반해 공급이 줄어 가격이 계속 올랐다. 덕분에 오름세인 실적을 유지했다. 반면 디스플레이는 매출은 늘었는데 신규 라인 증설에 따른 비용 등으로 전 분기보다 실적이 줄었다. 하지만 TV패널 부문은 실적은 줄었는데도 프리미엄 제품의 비중이 계속 올라 결과적으로는 전 분기보다 실적이 크게 늘었다. 생활 가전은 매출은 증가했지만, 북미 시장에 투자한 비용 때문에 영업이익은 감소했다. 무선사업 부문은 스마트폰 판매는 늘었지만, 중저가 제품의 비중이 높아져 매출·영업이익은 줄었다.
 
  주식 투자를 할 때 기본은 ‘달걀을 한 바구니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벤처 기업에 자금을 대는 엔젤투자자들의 원칙은 ‘투자한 10개 회사 중 1개만 이윤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40년 전에 미리 예측하고 기업을 설계한 경영인들의 노력이 오늘날 삼성전자를 절대 우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삼성전자가 누구나 살 수 있는 주식이 된 지금, 과연 시장의 평가가 어떠할지 향후가 주목된다.⊙
출처 | 월간조선 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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