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우리가 박태준 수입할까" 일본 제철소에 간 덩샤오핑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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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よしき 댓글 0건 조회 25회 작성일 24-09-20 17:09본문
[Why] "우리가 박태준 수입할까" 일본 제철소에 간 덩샤오핑이 말했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8.03.17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7>박태준(1927~2011)
강철왕 박태준이 없었다면 철강뿐 아니라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 향할 수 있을까
DJ정부 때 4개월 총리, 모진 성품이 없었던 그는 군인도 정치인도 안맞아
박태준은 1927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귀환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생으로 입학해 소위로 임관했는데, 사관생도 시절 제1 중대장이 박정희 대위였다. 그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포항제철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다. 포항제철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제철업에 꿈을 품고 있던 박정희에게 박태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꾼이었고, 박정희는 박태준을 전적으로 밀어줘 누구도 군소리를 못 하게 했다. 나도 두서너 번 포항제철 시찰을 간 적이 있는데, 제철소 시설이 엄청날 뿐 아니라 사원들을 위한 교육과 복지 시설도 대단했다. 포항제철 하면 박태준을 생각한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강철왕으로 군림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오뚝이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제철계 거물들을 만나 얘기하다가,
제철업을 하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꼭 필요한데 그가 포항제철의 박태준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그 말을 듣고 '그럼 중국이 박태준을 수입할 수 없을까'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이후 그를 정치판에 끌어들이려는 정당인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사람보다는 국무총리로 모시려고 정당 대표들도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통일국민당 대표 정주영은 자기가 집권하면 반드시 박태준을 국무총리로 모시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그는 국무총리에 취임했으나 중상과 모략 때문에 4개월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박태준은 정치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라도 미소 짓는 얼굴로 대했으며 남에게 싫은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본디 군인으로 시작한 인물이지만 군인 같지 않고 선비 같았다.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은 부드러웠다. 아는 사람들을 식당에서 만나면 점심값을 내주려 하고 누구에게도 교만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남들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는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태준이 언젠가 우리 집에 냉면과 빈대떡을 먹으러 온 일이 있다. 그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냉면에 매력을 느끼고 똑같은 시설을 포항제철 어딘가에 설치해 놓고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고 한다.
정치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남을 비틀 줄도 알고 밟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박태준에게는 그런 모진 성품이 전혀 없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포항제철을 건설하던 무렵부터 박태준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를 모신 측근 중 측근으로 알려진 여상환이 이런 말을 했다. "회장께서는 매사에 절차와 순서를 확정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국가와 민족이었고 개인은 그 서열의 맨 마지막에 있었다. 입버릇처럼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결과만 문제 삼는 사회가 잘못된 사회라고 했다."
조정래라는 작가는 박태준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 비유했지만 나는 그가 오히려 도산 안창호를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하고 싶다. '무실역행(務實力行)' 같은 도산이 내세우던 인생의 가치들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박태준이 아니었던가. 그는 33년 동안 포항제철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했고 이후 7년간은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임무가 다하였을 때 그것이 하늘의 뜻이었던 것처럼 눈을 감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의 나이 84세 때 일이다.
연세대 사회학 교수였던 송복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 매우 뜻깊은 만남이 두 번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을 만난 일이고 또 하나는 박정희가 박태준을 만난 일이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한 견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케 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에서 일본의 배를 수없이 격침하고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게 한 그의 배후에는 유성룡이 있었던 것 아닌가. 그 두 사람의 인연이 그렇게 맺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과연 7년 전쟁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만일 박정희가 박태준과 만난 일이 없다면 포항제철은 우뚝 선 세계적 기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태준을 믿었다. 박태준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박정희의 전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항제철이 있을까요?" 박태준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포항제철이 없습니다." 박정희의 절대적 지원으로 회사를 키우기에 박태준은 자기 자신의 시간과 정력, 희망과 욕망, 기쁨과 고통을 포항제철에 모두 쏟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 박태준을 회고하는 것 자체는 내게도 매우 감동적이다. 박태준이 없었다면 이 나라 철강업뿐만 아니라 경제가 세계 10위권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 포항제철에서 박태준을 도와 일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가 이 시대의 바람직한 일꾼이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8.03.17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7>박태준(1927~2011)
강철왕 박태준이 없었다면 철강뿐 아니라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 향할 수 있을까
DJ정부 때 4개월 총리, 모진 성품이 없었던 그는 군인도 정치인도 안맞아
박태준은 1927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귀환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생으로 입학해 소위로 임관했는데, 사관생도 시절 제1 중대장이 박정희 대위였다. 그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포항제철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다. 포항제철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제철업에 꿈을 품고 있던 박정희에게 박태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꾼이었고, 박정희는 박태준을 전적으로 밀어줘 누구도 군소리를 못 하게 했다. 나도 두서너 번 포항제철 시찰을 간 적이 있는데, 제철소 시설이 엄청날 뿐 아니라 사원들을 위한 교육과 복지 시설도 대단했다. 포항제철 하면 박태준을 생각한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강철왕으로 군림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오뚝이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제철계 거물들을 만나 얘기하다가,
제철업을 하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꼭 필요한데 그가 포항제철의 박태준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그 말을 듣고 '그럼 중국이 박태준을 수입할 수 없을까'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이후 그를 정치판에 끌어들이려는 정당인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사람보다는 국무총리로 모시려고 정당 대표들도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통일국민당 대표 정주영은 자기가 집권하면 반드시 박태준을 국무총리로 모시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그는 국무총리에 취임했으나 중상과 모략 때문에 4개월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박태준은 정치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라도 미소 짓는 얼굴로 대했으며 남에게 싫은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본디 군인으로 시작한 인물이지만 군인 같지 않고 선비 같았다.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은 부드러웠다. 아는 사람들을 식당에서 만나면 점심값을 내주려 하고 누구에게도 교만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남들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는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태준이 언젠가 우리 집에 냉면과 빈대떡을 먹으러 온 일이 있다. 그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냉면에 매력을 느끼고 똑같은 시설을 포항제철 어딘가에 설치해 놓고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고 한다.
정치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남을 비틀 줄도 알고 밟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박태준에게는 그런 모진 성품이 전혀 없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포항제철을 건설하던 무렵부터 박태준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를 모신 측근 중 측근으로 알려진 여상환이 이런 말을 했다. "회장께서는 매사에 절차와 순서를 확정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국가와 민족이었고 개인은 그 서열의 맨 마지막에 있었다. 입버릇처럼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결과만 문제 삼는 사회가 잘못된 사회라고 했다."
조정래라는 작가는 박태준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 비유했지만 나는 그가 오히려 도산 안창호를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하고 싶다. '무실역행(務實力行)' 같은 도산이 내세우던 인생의 가치들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박태준이 아니었던가. 그는 33년 동안 포항제철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했고 이후 7년간은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임무가 다하였을 때 그것이 하늘의 뜻이었던 것처럼 눈을 감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의 나이 84세 때 일이다.
연세대 사회학 교수였던 송복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 매우 뜻깊은 만남이 두 번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을 만난 일이고 또 하나는 박정희가 박태준을 만난 일이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한 견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케 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에서 일본의 배를 수없이 격침하고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게 한 그의 배후에는 유성룡이 있었던 것 아닌가. 그 두 사람의 인연이 그렇게 맺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과연 7년 전쟁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만일 박정희가 박태준과 만난 일이 없다면 포항제철은 우뚝 선 세계적 기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태준을 믿었다. 박태준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박정희의 전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항제철이 있을까요?" 박태준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포항제철이 없습니다." 박정희의 절대적 지원으로 회사를 키우기에 박태준은 자기 자신의 시간과 정력, 희망과 욕망, 기쁨과 고통을 포항제철에 모두 쏟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 박태준을 회고하는 것 자체는 내게도 매우 감동적이다. 박태준이 없었다면 이 나라 철강업뿐만 아니라 경제가 세계 10위권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 포항제철에서 박태준을 도와 일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가 이 시대의 바람직한 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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