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주식

[삼성전자]이런병신을 왕으로 모셨으니 ㅡ하기야 쿠데타로 집권했으니 무슨실권이있겄냐마는 ㅡ지금정권졸새겨들어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よしき 댓글 0건 조회 19회 작성일 23-09-11 06:14

본문

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일반적으로 남한산성은 ‘치욕의 성’으로 각인돼 있다.

조선조 인조가 청나라 대군에 쫓겨 피란했다가 결국 무릎을 끓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목불인견이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 1월30일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임금이시어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인조의 항복은 치욕 그 자체였다.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 입었다. 이어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의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끓었다. 신하인 주제에 임금을 상징하는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은 주제에 정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백마는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항복조인식이 끝난 뒤 술자리가 벌어졌을 때 또다른 굴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가 술잔을 돌린 뒤 술상을 물리려 했는데, 청나라 인 두 사람이 두 마리의 개를 끌고 들어왔다. 그러자 청태종은 상에 차려진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 마치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치욕의 의식을 끝내고 인조가 송파진을 통해 한강을 건널 때 눈뜨고 볼 수 없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배가 딱 두 척만 남아 있었다. 임금이 배를 타려 하자 소동이 일어났다. 대신들이 서로 배를 타려고 다툰 것이다. 심지어 인조 임금의 어의를 잡아 당기기까지 했다. 임금이고 뭐고 그저 저만 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사로잡힌 백성들은 임금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남한산성 행궁터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시기의 장란형 항아리.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도읍지인 위례성의 배후성이었다.
“임금이시어, 임금이시어.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以去乎)”

이 지경이었으니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싶은 역사이며, 장소이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1637년 1월 28일, 청나라가 조선에 내민 12개 조항의 항복조건 가운데 미묘한 내용이다.

“용골대가 청 태종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그들의 연호를 버려라.~ 또 있다. 성벽(城壁)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의 성을 보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특별히 강화의 조건에 넣어 강조한 것이다.

물론 조선측은 이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왜 성을 개축하는가’

그런데 청나라는 이 합의 내용의 이행을 감시할 사절을 해마다 보낸다. 조선이 성을 새로 쌓았는지, 기존의 성을 개축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참견한 것이다.

예컨대 전쟁이 끝난 지 2년 8개월이 지난 1639년(인조 17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칙사 마부달의 행보를 보자.

마부달 등은 삼전도비를 보고는 사냥을 핑계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첩(城堞·성 위에 쌓은 담장)을 살펴본 뒤 앙앙불락했다. 병자호란 뒤 조선은 왜적을 막는다는 구실로 남한산성을 보수했기 때문이었다. 이 보수사실을 청나라 사신이 현장답사 후 알아차린 것이다.

“도대체 이 무슨 짓인가. 당초 양국 간의 합의를 보면 남한산성과 해도(강화도)를 다시 수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 산성을 두루 살펴보니 산성 안에 네 곳이나 곡식을 쌓아 두었고 성기(城基)를 물려 쌓고 포루(砲樓)도 개설했구나. 너희 나라가 어떤 간계(奸計)를 가지고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그러면서 청 사신은 “빨리 허물지 않으면 청나라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조선 각 도의 성(城)들을 살펴볼 것”이라고 협박했다.

조선은 화가 난 청 사신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양국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왜구 방비 때문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주나 부산과 같은 변방의 성은 괜찮다. 다만 남한산성만은 안된다.

“대국의 명을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헐어버리는 것도 수축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 새로 설치한 포루(砲樓)만 헐도록 해주시면….”

남한산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다.

1년 뒤인 1640년(인조 18년), 청나라는 조선에 칙서를 보내 또 남한산성 수축문제를 거론했다.

“지금 또 한번 지시를 어기고 남한산성과 평양성을 마음대로 수축했다니 이 무슨 심사인가. 다시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청야전술을 피하라

사실 조선은 고조선·고구려의 전통, 즉 청야전술을 이어받았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병력과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도모하는 산성 위주의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 산성전술은 정묘호란 때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당시 후금이 평안도의 산성을 공략하느라 어느 정도 애를 먹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는 달랐다. 최강의 기마군이라는 평을 듣는 청나라의 팔기군(八旗軍)은 조선의 청야술을 피해 속전속결 전략을 폈다.

6000명의 선봉부대는 곧바로 한양을 직공했다. 대신 일부 병력들은 조선병력을 산성에 묶어두는 전략을 폈다. 청나라 선봉대는 압록강 도하 불과 6일 만에 한양 도성에 근접했다. 서울~신의주 간 거리가 500㎞ 쯤 되니까 하루 80㎞ 이상씩 말을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인조 임금이 급히 피한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한없이 밀리기만 했던 조선이었지만 무려 45일을 남한산성에서 버텼다. 그러니 청나라군으로서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강화조약의 중요한 조건 하나가 “절대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 성이라도 보수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3-09-12 12:48:53 주식에서 이동 됨]
추천0 비추천0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골팅
Copyright © Goalting.com All rights reserved.